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의 국력은 대단했다. 청나라는 직전 황조였던 명나라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자랑하면서 주변국가들을 복속시키면서 당대 세계 최강의 제국임을 자처하였다. 청나라의 국력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3명의 현제 치세 기간 동안 전성기에 달한다. 역사상 한 번 나오기도 힘든 현제들이 우수수 쏟아진 이 시기 동안 청은 엄청난 골칫거리였던 몽골도 완전 복속시키며 태평성대를 구가한다. 최후의 유목민 제국이라고 일컬어지던 준가르왕국도 건륭제 때 완전히 멸망한다. 3현제 당시 청제국은 ‘지물박대’라는 말이 있듯이 거대한 영토와 많은 인구, 풍부한 물산으로 외국과의 교역은 전혀 필요 없는 완벽한 자급자족 경제를 이룩하였다. 하지만 이런 청나라의 전성시기는 3현제 시대의 종료 후 막을 내린다.
< 나는 이렇게 시추 강아지를 안고 있으면 참 기분이 좋아진다. 2012년 2월 인천 월미도 애견 카페에서 >
아편전쟁의 패전과 연이어 발생한 서구 제국주의의 중국 침탈로 청나라 국민들의 삶은 극도로 곤궁하게 된다. 그로부터 150여년의 중국 역사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 가까워진다. 외세에 의한 반식민지 착취, 일본 제국주의자와의 기나긴 전쟁, 국공 내전, 공산당 통일 후 벌어진 대약진운동의 참담한 실패 과정에서 수천만 명의 중국인들을 생명을 잃게 된다. 중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악몽과 같은 지난 백오십 년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 자기를 안아주지 않자 토라진 시추의 귀여운 모습 >
그런 와중에 피해를 입은 것은 중국인 뿐만 아니다. 천하태평을 구가하던 황실견인 페키니즈와 시추는 사방 팔방으로 흩어졌다. 그 개들은 고귀한 황족이나 고관 대작들이나 애견으로 키울 수 있는 개들이지만 청제국이 무너지며 누구나 키울 수 있는 보편적인 개가 되었고 그 중 일부는 미국, 영국 등 서구권 국가들로 퍼져나갔다.
< 인천 월미도 애견 카페 뮬란에서 만난 시추 >
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중국을 반식민지배하던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대륙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된다. 하지만 그 다음에 찾아온 국민당군대와 공신당 군대간의 통일전쟁은 다시 한 번 중국 본토를 전역을 전쟁터로 만들게 한다. 공산당이 1949년 중국을 통일하였지만 중국의 경제 상황은 그리 녹록하치 못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중국 공산정권은 1950년 이른바 항미원조를 명분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전후 세계 최강으로 확실히 자리 매김한 미국을 적으로 만드는 우를 범하고 만다.
그 뿐만 아니다. 마오쩌뚱은 1958년부터 1960년까지 농촌의 현실을 무시하고 대약진운동을 밀어붙여서 제 2차 세계대전의 사망자보다 많은 약 3천만명이라는 아사자를 내는 참당한 실패를 경험한다. 이 운동으로 인해 마오 주석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약화되게 된다. 그는 국가주석직에서 은퇴하고 허울 뿐인 당주석직만 맡게 된다. 요즘 정치권 용어로 따지면 이선 후퇴라고 할 수 있다.
< 화이트 페키니즈 >
하지만 중국의 혼란은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혁명은 더 많은 피와 희생을 요구한 것이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던 마오쩌뚱은 류사오치 국가주석과 덩샤오핑 당총서기에게 빼앗긴 권력을 찾기 위해 그들이 추진하던 개혁 정책에 반기를 든다. 이른바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물론 문혁의 명분은 거창했다. 소련이 펼치고 있는 수정주의의 폐해가 중국에서도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라고 했다. 하지만 그 내면은 권력 투쟁에 불과한 것이다.
문화대혁명은 2000여년 전 벌어진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비유될 만큼 잔혹하고 비문명적이었다.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1976년에야 비로소 막을 내렸는데 당시 혁명의 광기 때문에 수 많은 지식인들과 개혁주의자들이 희생당했고 시골로 추방당했다. 물론 류사오치, 덩샤오핑의 개혁 정책으로 약간의 부흥 기미를 보이던 중국 경제는 문혁 기간 동안 찬서리를 맞게 되었다.
< 페키니즈, 사진: 위키피디아(영어판) >
당시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홍위병 등 주축 혁명세력들은 학문, 예술에 대한 테러를 서슴치 않았다. 의식있는 지식인이 반동이라는 이유로 살해되거나 추방을 당하고 수 많은 책과 그림, 문화재가 불타고 부서졌다. 그런데 당시 그 불똥은 엉뚱하게 개에게도 튀고 말았다. 홍위병 등은 브루조아의 생활방식을 척결하고자 노력하였는데, 그들의 눈에는 “개를 키우는 것은 부르조아식 행태”였다고 한다. 참 어이 없는 발상이다. 그 결과 많은 애견들이 이유 없이 학살되었다. 그리고 개를 키우는 사람들에 대한 테러도 서슴치 않았다. 하기야 당시 중국 공안들도 홍위병들의 이러한 대단한 위세에는 숨을 죽인 상황이었다. 무법천지란 이런 상황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의 여진은 수십 년 후 서울에 사는 우리집에도 영향을 미쳤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우리 집에는 중국인들이 몇 명 찾아왔다. 우리 집에서 키우던 시추를 자기들에게 팔라는 것이었다. 당시 어머니는 우리집을 중국인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도 궁금했지만 그것보다 왜 중국인들이 중국개를 우리나라에서 찾는지가 더 궁금하셨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거의 이구동성으로 “너무 많은 중국 전통개들이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죽었다. 하지만 이제 중국이 경제적으로 부흥하다 보니 옛 전통을 중시하게 되었다. 그런 차원에서 중국이 원산지인 페키니즈, 시추와 같은 개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들은 “중국에는 쓸만한 시추나 페키니즈가 없다. 만약 있다고 해도 오랜 세월 방치되면서 다 잡종견이 되었다. 아쉽지만 일본이나 한국에 있는 시추와 페키니즈를 구입하여 다시 중국에서 키우게 되었다”고 말했다.
불행한 중국 근현대를 거치면서 중국개 시추, 페키니즈는 외국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그 때 외국으로 나갔던 중국개들의 후손은 본국에서는 거의 멸절된 그들 친척들의 자리를 다시 채우기 위해 귀국한 것이다. 역사란 이렇게 아이러니한 것이다.